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 지용 선생의 "향수" 의 일부분이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선생이 고향 선배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선생의 고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옥천인 탓일까.
아니면 예전 우리 농촌 생활이 거의 비슷한 여건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는 마치 어릴 적 내 고향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느낌이다.
사실 나는 고향 운운하는 것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니 먼 객지에 나가 계시는 분들이 느끼는 고향의 느낌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집에 갈 때마다 분명 무언가 달라진 모습을 느끼는 것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나이도 나이려니와 그 옛날 포근하게 감싸주던 어머님의 품안을 느낄 수 없으니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위 작품에 나오는 마을처럼 우리 동네에도 마을 한 가운데에 개천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하천의 모습도
거의 반듯하게 나 있고 경사가 가파른 시멘트 옹벽으로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사뭇 그 모습이 달랐었다.
냇물도 지금보다는 훨씬 넓었었고 중간 중간 보가 있어서 여름에는 미역을 감다가 지치면 미루나무 그늘
아래 벌렁 누워서 쉬기도 하였다.
눈부시게 하얀 조약돌들이 펼쳐져 있는 시냇가에서는 고기를 잡기도 하고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하였다. 때로는 보리밭에 들어가 깜부기로 서로의 얼굴에 먹칠하려 뛰어다닐라치면 화들짝 놀란
종달새가 하늘높이 솟구쳐 오르고, 저녁 무렵 소 꼴을 먹일 때면 고기들도 밥을 짓느라 펄쩍펄쩍 물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평화로운 곳이었다.
유년시절 나는 '건넌 들 아이'였다. 개울 건너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던 나는 여름에 장마가 져 개울이 범람할 때면 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다. 결석으로 인정되지 않을
뿐더러 학교를 쉰다는 데에 철없이 기뻐 했었다.
우리들이 노는 장소도 몇 군데 정해져 있었다. 교회 마당은 제일 넓은 곳이었고, 윗 뜸의 묘 마당도 아주
좋은 놀이터였다. 엄마가 시장에 가신 날이면 차가 다니는 큰길가에 나가 놀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때 당시는 그렇게 넓던 동네가 지금은 아주 좁아진 느낌이다. 한참을 달려 다녀야 했던 윗뜸과
건넌 뜸이 서로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시냇가 풀밭이 없어진 만큼, 아니 그 보다도 훨씬 더 동네가 오므라
들은 느낌이다.
어릴 적 그토록 아스라하게 보이던 먼 산도 바짝 다가와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마치 탄력성 있는 용기가
안에 있던 물건들이 빠져 나가면서 그만큼 줄어든 모양 같다.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며, 이른 아침 차턱에모여들던 아이들의 재잘거리던 모습도 사라진지 수년째,
그러나 이보다도 더 아쉬운 것은 이웃간 풋풋하게 주고받던 인간의 정도 함께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명절때가 되면 못 보던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고향을 찾아오는 발길도
그다지 많지않다. 내 지신부터도 성묘가 끝나기 무섭게 고향집을 나오기 바쁘니 할 말은 없지만,
이번 설 명절은 우리들 마음속의 고향을 되새겨 보면서 우리 농촌이 처해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는 그런
연휴가 되었으면 한다.
<2005.2.11 부여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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