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남해1박2일 - 노도. 유배문학관

서해안 나그네 2015. 12. 26. 16:09

 한려수도국립공원 중 유일하게 육지관광인 남산 답사를 마치고 이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였던 노도로 향한다. 선착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은 좁은 비탈길인데다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주차까지 해 놓아서 버스가 진입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노도가 문학의 섬으로 새롭게 변모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텐데 진입로 장애 문제도

함께 해결하여야 할 것 같다.

 

 

 

 

 

 

남해에서 노도까지는 배로 약 5분 정도면 도착한다.

입구에 김만중선생 유허비가 서 있어 이곳이 김만중선생과 관련 있음을 금새 느낄 수 있다.

 

 

마을 초입에 건물 벽을 뚫고나온듯한 나이 먹은 나무 한그루가 무언가 이야기를 들려줄 것 만 같다.

 

 

무화과 열매

 

 

이곳에서부 약 5~6백미터는 걸어야 김만중선생이 묵었던 초가가 나온다.

 

 

" '한양에서 천사십오 리', 감히 한양을 넘볼 수 없을 만치 아득히 멀기만한 땅에 불과했던

남해는 때를 잘못만난 선비들에게는 눈물의 유배지였다.  고려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30명 정도가 남해군에 유배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서포 김만중(1637~1692)이다.

 

김만중은 남해섬에서도 1km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노도에서 적적하고 삭막한

유배생활을 했다.  1985년까지만 해도 노도는 등잔불을 켜고 살았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본디 삿갓처럼 생겨서 삿갓섬이라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노를 많이 만들었으므로

노도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김만중은 세도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한때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 높은 벼슬자리를

두루 거친 이다.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 난 아들의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서 그가 속했던 서인이 실각하자, 숙종 15년(1689) 관직을 박탈당하고

남해 외딴섬 노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온종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한숨짓던 노인 김만중을 일컬어 마을사람들은 놀고먹는

할아버지란 뜻으로 '노자묵자할배'라 불렀다고 전한다."

 

 

 

 

유배 초옥으로 가는 중에 보이는 바다의 모습

 

 

 

 

 

초옥 마당끝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김만중선생이 사용했다는

우물터가 나타난다.

 

 

김만중선생은 이곳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 유배를 하고 울타리마저 가시나무로 둘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백나무 울타리가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탱자나무 같은 수목이 자라지를 않아 재현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옛날 선생의 한많은 유배길이었을 곳이 지금은 낙엽 가득한 낭만의 길로 변했다.

 

 

 

 

 

노도 운항시간표

 

 

노도 선착장에서---

 

 

 

 

"김만중 외에도 남해로 유배와 주목할 만한 문학작품을 남긴 이로는 자암 김구와 후송 유의양이 있다.

양평대군, 한호, 양사언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김구는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10여 년 동안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지어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따뜻한 인심을 널리 알렸다.

 

남해를 일점선도(一點仙島:신선의 섬)라 표현한 것도 '화전별곡'에서이다.

화전은 남해섬의 옛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 예조참판을 지내다가 유배온 유의양도 남해에서 1년 남짓 지내면서

당시 남해 풍물을 상세히 묘사한 풍물지 '남해견문록'을 남겼다.

'남해견문록'은 한글 작품이다."

 

 

이제 마지막 코스로 유배문학관을 잠시 들렀다.  역시 입구에 김만중선생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1박2일의 2015년도 부여문화원에서 주관하는 공직자를 위한 문화유산순례강좌가

끝이 났다.  언제나처럼 이번 여행도 내는 회비에 비해 과분한 접대를 받은 것 같다.

게다가 해설사 하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많은 스토리를 간직한 남해,  그리운 풍경과 그리운 얼굴 하나를 또 남기고

돌아온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