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윈극장에선
교향곡 <運命>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원의 손과 귀,
베토벤, 그는 1827년에 죽었던가,
그 음악은 이조말의 반도 하늘에도
메아리쳐 오고 있었을까,
베트남 정글 속에선,
불란서 식민지 침략군 맞아 싸우는
원주민의 우렁찬 함성,
일본에선
2백 년의 봉건쇄국주의가
문을 깨치고
미일수호조약을 체결,
기름기 오른 군벌자본가들이
요정에 앉아 공장을
설계하는 날,
경복궁에선
조대비가, 중국 곤륜산서 따온
사슴 사향,
양지바른 대청마루 앉아
천산남로 거쳐온, 중국상인과
흥정하고 있을 때.
1854년,
전봉준은
서해가 보이는 고부 땅
두승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내려오는
농민의 아들,
키는 절구통 같은 오 척,
시원한 이마
맑고 두리두리한 눈동자가
벌어진 어깨 위에서 빛났다.
편안한 코,
우렁우렁한 음성은
듣는 사람의
살 속에 스몄다.
어려서부터
말이 없었는 편.
서당에서 책 끼고
돌아오는 길,
양지쪽 메운
동네 아이들의 맨발과
두 줄기 콧물 보면,
함께 뛰어들어
자치기, 연날리기,
말타기, 씨름을
이끌었다.
고욤나무,
대나무가 많은 마을,
병으로 십여년 누워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농사일도 하고
서당 훈장일도 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리어
이따금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추석날이면
국화,
칠석날이면
참외,
세월은 갔다.
철이 들수록
그는 말수가 더
적어갔다.
어느날,
삼례장 갔다 오는 길
길가 주막집 들러
막걸리 두 대접 마시고
나오니 누군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충청도, 동학접주 서장옥.
첫눈에 썩
뛰어난 그의 인품에
놀란 서장옥이,
부지런히 풋고추 고추장 찍어
입가심하고 뒤를 따라나섰다.
밀밭길 걸어오면서
열혈파 서장옥은 동학얘기를 했다.
소맷 속서 꺼내 주는
필사본 동경대전에서
들기름 냄새가 풍겼다.
개화정변에 실패,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상투 깎고 어두운 마음
동경 은좌거리를
걸어오고 있을 때,
1888년
전봉준은, 서장옥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했다.
태백산 속
은신해 있던 해월이
보은으로 나왔다.
나흘을 걸어 보은땅
속리산 기슭 초가집에서
전봉준은 해월을 만났다.
수중 십만리
걸어온 사람의 얼굴이었을까,
가시밭길 삼만리
맨발로 걸어온 사람의
얼굴이었을까
나무뿌리같이 드러난,
뼈로 얽어놓은
육신
그 속에서
하늘이 주었을까,
깊은 눈동자만, 조용히
세상을 뚫어보며
빛나고 있었다.
해월은,
1898년 6월 2일
서울 광희문밖 형장 교수대에서
순교하던 일흔두살,
삼십사년 간을, 탄압에 쫓기며
동학을 물고
전국 방방곡곡
농어촌 찾아
노동자를 조직,
포교했다.
상엿군,
장돌뱅이,
거지,
엿장수,
로 변장하고.
어느 여름
동학교도 서노인 집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수저를 들으려니
안방에서 들려오는
베 짜는 소리,
<저건
무슨 소립니까?>
<제 며느리애가
베짜는가봅니다>
<서선생,
며느리가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한울님이십니다.
어서 모셔다가
이 밥상에서
우리 함께 다순 저녁
들도록 하세요.>
서노인이, 며느리 데리고 나와
상머리에 앉을 때까지
해월은 경문 외며 정좌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해월을 전송하러
서노인 집안이 동구 밖
논길까지 나왔다,
막내아이가
따라나오며 우니
서노인은 눈을 부릅떠
위협, 쫓아보내려 했다,
해월은,
주인을 가로막아
어린이의 머리 쓰다듬으며
그 자리 흙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서노인에게
말했다,
<이 어린 분도
한울님이세요,
소중히 받드세요.>
가는 곳마다,
내일 떠날지
오늘밤 떠날지
알 수 없는 빈 집,
쓰러진 외양간에 묵으면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노끈을 꼬고
구럭을 얽고
과수나무를 심고
채소씨를 뿌렸다.
할일 없으면
꼬았던 노끈 풀어서
다시 비볐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몇 날 안가 또
딴데로 떠나셔야 할 텐데
그런 일 해
뭘 하시렵니까>
<안될 말,
한울님께서 사람을 내신 건
농사지으라고 내신 건데
농사짓지 아니하고
생산하지 아니하면
양반보다 나을게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리가
혹 이 멍석 쓰지 못하고
이 채소와 과일 먹지 못하고
딴데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멍석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따먹게 될게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농장은
모든 인류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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