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에서
도망나오는 길이예요
눈독들이는 그 늙은이들의
입김이 싫어 못 배기겠어요.
추석이 지나니 고향 생각도 나고.
아버지 장사지내러 왔었어요,
제 고향은 황해도 해주.
경복궁 개축공사 부역일에
아버지가 끌려왔었어요,
육십 넘은 아버지.
등짐하다 바위 밑 깔려
객사하셨대요,
한강가
제 손으로 묻어 드렸어요.
돌아가는 길 어느 노파에 끌려
궁으로 들어갔죠.>
<우물 점이 있군요,
당신의 이마엔.
언제부터 그 하늘의 그늘
생겼는지 기억하세요?>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제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성이 도장인자예요.
이름은 진아.>
<이상하군요, 어젯밤 나는
삼청동 객삿집에 묵으면서
꿈을 꿨소.
나라 위 자욱히
안개가 덮여 있더군,
고구려성의 왕관을 주웠어요.
휘황찬란한.
금강산에서 내려왔다는
흰 말이 내 앞에 무릎꿇더군.
그래 신발 대신 왕관을 신었는데
한쪽 발에 신을 신이 없어
걱정하다 잠을 깼소.>
<저도 꿈을 꿨어요.
백제땅 금강이래요.
목욕하고 나오다
모래밭에서
사슴의 뿔을 얻었어요.
그 사슴의 뿔이 갑자기
용이 되어 하늘로 꿈틀거리며
오르더군요.
선생님, 저는 지금
도망가는 몸이예요.
고향도 안되고
어디 가면?>
<우스운 인연이군요.
고구려의 밭,
백제의 씨,
우리들의
편안할 곳은 지금
아무데도 없오.
하늘과 땅,
눈먼 구데기떼처럼
땅에 엎디어 매질 받으며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뿐
벙어리가 된
노예들의 땅.
그러나,
가십시다. 진아라고 했죠?
금강 언덕
초가삼간.
아직
차령산맥 남쪽에
서기가------>
추석.
가랑잎 위에서, 둘의 알몸뚱이는
꽃뱀처럼 얽혀 빠알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을의,
바람과 햇빛과 산 속의
정기를 빨아들이면서, 둘의 피는
음악처럼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설악산
양양골에선
海月이 양지밭에 앉아짚신을 삼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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