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부소산성은 사적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 2,200m, 지정면적 98만 3900평방미터로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 반월루, 군창지, 궁녀사당,
낙화암, 고란사, 서복사지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산성은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써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부소산성의 사비관광주차장. 봄 가을 수학여행철이면 언제나 비좁아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오른쪽 건물이
충남관광안내소, 가운데가 백제8문양 탁본과 복식체험장인데 이곳 역시 좁아서 체험하는 사람들이 늘 불편을 겪고있다.
부소산성내에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던 기념품 가게들을 몇 년 전에 일부만 남겨두고 이곳으로 옮겼다. 기념품들이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전국공통의 제품들이다. 부여만의 관광상품을 구입하려면 관광안내소나 부여박물관, 정림사지 불교박물관 등에
가면 구입할 수가 있다.
부여군이 위민행정에 가장 반하는 행동을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이곳은 관광객들이 주차를 하고 안내소를 들러 부소산
정문 입구로 쉽게 가도록 만든 계단이었는데, 상가들을 옮기면서 그들의 원성에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인위적으로 가게앞을
지나도록 하기위한 조치인데 관광 성수기 때는 사람들이 주차장을 통과해야 하기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한참을 돌아가야하니
원성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게앞을 통과시켜 얼마나 매출이 향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길도 내야하는 판에 있던 길을
없애는 부여군의 행태는 분명 문제가 있다. 같은 구성원으로서 누워서 침밷는 격이지만 이곳을 볼 때 마다 울화가 치민다.
상인이 우선인가 찾아오는 관광객이 우선인가!
전에는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바로 이 표지판과 마주쳤는데 지금은 주차장 입구로 다시 나갔다가 상가앞 길로 빙 돌아
올라와야지만 이 입구 안내표석을 만날 수 있다.
부소산성의 정문격인 사비문. 부소산에는 이 곳 사비문과 시가지 쪽에서 곧장 올라오는 구문이라 불리는 곳, 그리고 최근에
구드래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새로 개설한 서문이 있다.
입장하기 전에 사비문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부소산성 안내도를 보고 시간에 맞춰 코스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사비문을 통과하면 이런 부소산탐방로가 나타난다. 발에 지압효과도 있고 밟는 감촉도 좋다. 물론 옆에 평평한 길이 따로 있다.
박석길을 따라 오르면 곧장 갈래길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 온 관광객들은 어디로 가야할 지 난감할 때가 있다.
부소산성은 두 시간 이상은 걸어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시간이 없는 분은 왼쪽길을 택해 낙화암 고란사만 다녀올 수도 있다.
그래도 한 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삼충사 외삼문인 의열문.
부소산성의 진면목을 보려면 앞의 갈래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야 되는데 바로 만나는 곳이 삼충사다.
삼충사는 백제말기의 삼충신, 즉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사당이다. 1957년 삼충사 봉건기성회라는 모임에서 삼충사를
처음 지었으며, 국가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여 1981년 11월에 다시 지었다. 매년 10월 백제문화제 때에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이곳은 일제가 황궁을 지으려던 곳으로 주위에 아직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삼충사 내삼문인 충의문.
삼충사 본당.
내가 본 부여의 건물 중에서는 처마선이며 치미가 가장 아름답게 재현된 건물로 생각되어진다.
삼충사를 본 다음 계속해서 오른쪽의 큰 길을 따라가는 게 정 코스이지만 왼쪽 오솔길을 따라 숲으로 오르다보면 부소산성길을
만나게 된다. 이 산성을 따라 걷다보면 바로 반월루와 수혈주거지를 만나게 된다.
이런 산성이 부소산을 빙 둘러싸고 있어 지역 사람들의 운동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그냥 오솔길처럼 보여 어느 학생은 실 컷
부소산을 둘러보고 와서는 산성은 어디 있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반월루. 이곳에 오르면 부여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운좋은 날에는 백마강 일몰의 비경을 접할 수도 있다.
반월루에서 본 시가지. 왼 쪽에 정림사지가 보인다.
반월루에서 바라다 본 백마강
두 개의 반월루기가 걸려 있다.
부소산 수혈건물지 자료관.
부소산 탐방로는 대부분이 완만한 형태여서 남녀노소가 편리하게 산책할 수 있다. 가끔은 몸이 불편한 분들의 재활장소로도
사용되고 있는 현장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경치가 제격이다.
군창지.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곳으로 일명 만리창이라 불리워 왔던 유적이다.
1981년과 82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1차에서는 '口'자 형태를 이루는 4기의 조선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2차년도에는 건물지 주춧돌의 아래층에서 자연 암반층을 파내어 만든 구덩이를 조사하였다
군창지의 초석은 방형초석이 주류를 이루는데 현재의 지표 47cm 정도의 아래에서 길이 약 70cm, 넓이 약 7m 크기의
창고유적이 발굴되었으며, 타다 만 쌀. 보리. 콩 등이 많이 니왔다. 그리하여 이를 백제군창이라 이름붙인 것인데, 이는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공격을 받고 망할 때에 모두 불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군창지와 영일루 사이에 태자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외지에서 온 분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지금은 안내
표지판이 잘되어 있어서 찾기가 용이하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숲길로 연인, 가족은 물론 혼자서 사색하는 길로도 최고다.
때마침 영일루가 공사중이라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나그네의 목을 적셔주는 태자천.
이 태자골 숲길은 포장되지 않은 숲길이라서 더욱 좋다. 이 길을 따라가면 궁녀사당이 나오고 다시 군창지와 서복사지쪽으로
이어지는 길과 광장에서 만나낙화암쪽으로 하나의 길로 합해진다.
중간중간 이런 쉼터도 있고,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다.
궁녀사.
궁녀사는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할 때 충절을 지키려고 낙화암에서 죽음을 택한 이른바 3천궁녀로 불리는 백제여인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6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매년 10월 백제문화제 때 궁녀제를 지낸다.
궁녀사 옆에 가을옷을 벗지 못한 측백나무(?)가 우뚝 서 있다.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부소산성 광장.
부소산 내에는 이곳 광장과 삼충사 광장에 문화관광 해설사 선생님들이 상주 해 있어서 해설은 물론 길 안내와 관광 팜플렛
등도 얻을 수 있다.
부여에는 유적지마다 이런 포토죤을 설치 해 놓았다. 어느 분은 이곳에 모델이 서고 카메라는 다른 곳에 가 있는데 사실은
이곳에 카메라가 위치해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표시이다.
사자루.
해발 106m의 부소산 정상에 있는 누각으로 백제시대 달을 맞이했다는 송월대터에 있는데, 지금의 건물은 1919년 임천에 있는
임천문루(배산루)를 옮겨서 지은 것이다.
사자루를 사비루라고 읽어야 맞다는 설도 있다.
사자루에서 본 백마강.
멀리 백제문화단지 능사가 보인다. 앞에 현대식 건물이 롯데부여리조트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사자루 옆에 단풍이 아직도 아름답게 남아 있다.
사자루에서 내려와 낙화암으로 내려가는 계단길이 막 시작하는 곳에 이런 연리지 나무가 있다. 바로 길 옆이고 안내판까지
해 놓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친다.
백화정(百花亭 : 충남문화재자료 제 108호)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군수 홍한표의 발의로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혜주에 유배되었을 때 성밖에 西湖가 있어 "江錦水樹百花州 (강은 비단같고
꽃은 백화네)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곳의 강 이름이 금강이니 정자를 세워 "백화정"이라 한 것이다.
백화정기인데 무슨 뜻인지 내 실력으로는 읽지도 못하겠다.
백화정 위에서
낙화암에서 찍은 모습. 아래 보이는 곳이 고란사 유람선 선착장.
이곳이 2010세계대백제전 때 수상공연장으로 쓰였던 곳.
고란사.
고란사는 고려시대 때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지어진 절이다.
백제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아닌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 이름은 뒷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하였다. 현재의 법당 건물은 1959년 은산면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 건물을 옮긴 것이다.
암벽 한가운데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는 고란초.
예전의 풍성했던 고란초의 모습은 이제 사진속에서나 볼 수 있다.
한 잔에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
고란사 종각 옆에서 본 고란사 선착장. 맨 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바위가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있는 조룡대이다.
부소산은 비교적 길이 완만하지만 사자루에서 낙화암, 낙화암에서 고란사까지의 각각 200m 정도는 가파른 계단길이다.
때문에 어느 분들은 구드래에서 고란사까지 유람선을 이용해서 편하게 고란사와 낙화암을 관람하는 경우도 있다.
부소산 서복사지(향토유적 제53호)
부소산의 서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일명 서복사지라고 불려지나 寺名이나 유래가 전해지지 않는
폐사지이다. 이 사지에서는 부여 시가지 일대는 물론 백마강과 부여 인근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기도 하여 전면의 풍광이
좋은 산지가람이다.
1942년 8월 일본인 요네다미요지(米田美代治), 후지사와가즈오(藤澤一夫)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그 전모를 살필 수 없었으나, 1980년 재조사가 이루어져 중문 - 목탑 - 금당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남북자오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강당이 없는 특수한 가람임이 확인되었다. 강당이 없다는 점은 출토유물과 더불어
가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또한 금당지의 와적기단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군수리 사지의 와적기단과 더불어 백제시대 기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서복사지 옆으로 내려가면 최근에 개설된 서문 매표소와 통한다.
구 부여국립박물관 건물로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들어 있었으나 지금은 부여군의 고도문화사업소가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작품으로 왜색이 짙다하여 여론에 자주 회자되었던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부여객사. 1869년에 세워졌는데 중앙의 正堂을 한층 높게 세우고 그 좌우에는 東西翼室을 두었다.
내동헌.
부여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부여고도문화사업소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건물로 외동헌. 객사. 내동헌 등 3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외동헌은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현청으로 1869년(고종 6)에 세워져 1880년에 중수되었으며, 1985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시대의 건축용 석재로 낮은 기단을 구획하고 역시 방형. 원형의 백제시대의 주춧돌을 이용하여 방형기둥을 세웠다.
앞면에는 퇴주를 세워 툇간을 두었다.
서쪽 3칸 통간은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2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그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또 대청에는 판벽을 쳤다. 기둥 위에는 공포가 없으며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에는 초연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시대관아 전경
-설명문은 연재선생기념사업회의 백제고도 부여 답사자료, 우리고장문화유적길라잡이(부여군, 부여문화원)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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