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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이들

서해안 나그네 2012. 1. 20. 22:53

 

어느 날 소장님께서 소 책자 한 권을 건네 주셨다.

여행 온 학생들이 화장실에 놓고 간 것 같은데 내용이 짜임새 있게 잘 꾸며져 있다면서 살펴 보라는 것이었다.

서울 중동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의 고적답사 길잡이 책이었는데 정말로 장마다 선생님들의 정성이 담뿍 담긴

그런 안내 책자였다.

'백제의 숨결 따라' 라는 제목으로 첫 장에는 학교의 명예를 지키고, 공동체 생활의 소중함을 행동으로 보여주자는

다짐과 함께 자신이 타는 차량 번호와 숙소의 호실 및 선생님 연락처를 기록하게 하여 학생들이 우왕좌왕 하지 않도록

해 놓았다.

다음 장에는 차 안에서나 답사지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열거 하면서 '우리의 작은 행동에 나, 부모님, 선생님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라는 말로 아이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한반도 지도를 삽입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들을 체크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답사지에 대한 지리적 상식과 관심을 높여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백제 역사에 대한 요약과 답사 할 유적지 설명을 사진과 함께 곁들이고 그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 등을 정리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아이들이 유적 한곳한곳을 예사로이 넘기지 않도록 하였다.

게다가 낙화암, 고란사, 부소산성 등 유적 이름을 사용해서 삼행시 또는 사행시를 지어 보도록 하고 박물관 전시 유물 사진을

게재하여 관람시 그 유물을 찾아 이름을 적어 넣도록 하여 아이들의 심도있는 관람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임시 용돈 기입장을 마련, 학생들의 무분별한 낭비를 예방하는데도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서는 하루를 정리하면서 방을 함께 쓴 친구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여 어린 시절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혹자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 이미 다 하고 있는 일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10개월 여 동안 사적지를 관리하며 느낀 바로는 가장 감동적이었다.
물론 많은 학교에서도 답사 자료를 준비 해 다니고 있지만 이처럼 선생님들의 정성이 돋보이는 충실한 자료는 보지 못했다.

나는 부소산성을 찾는 학생들에게 어디서 왔으며, 전날 어디서 숙박했는지를 버릇처럼 물어보곤 한다.

내심 우리 지역에서잤다는 소릴 듣고 싶어서이지만 아쉽게도 그런 답변은 자주 들을 수 없다.
그런데 의외로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기가 머물렀던 곳이 어딘지, 무엇을 보았는지 답변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어디 커다란 콘도였다는 등---.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현장 학습에 대한 사전 교육이 전혀 없었다는 반증이다.
이러니 오직 울안을 떠나 하루 이틀 야외에 나간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부소산성을 다 보고 내려와 여기 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는 그저 픽하고 웃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초등학생뿐 아니라 중, 고등학교 학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들을 학생 개개인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 것인지.

비록 이십여 쪽의 작은 책자에 불과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중동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들의 세심한 정성은 그래서

시사 하는바가 크다.

그 책속에는 아이들이 혹 대열을 이탈하여 낯선 곳에서 헤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선생님들의 자상하신 마음이 담겨있고,

외지에 나가서도 예의바른 행동을 보이라는 교훈이 담겨 있으며, 제자들에게 한가지라도 더 알게 하려는 알뜰한 노력이

담겨져 있다.

그런 선생님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앞에서 지적한 사례와 같은 맹목적인 답사 유형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런 짜임새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머물다간 자리는 확연하게 깨끗하고 아름답다.

전국의 수많은 학교 가운데에서도 이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중동 초등학교 학생들이야말로선택받은 행복한 아이들이란

생각을 해 보면서 어수선한 교육정책 속에서도 묵묵히 정성을 다 해 2세 교육에 헌신 해 오시는 선생님들께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감사를 드린다.

<2004. 11. 15 부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