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는 참 좋은 곳이다.
내가 태어나 지금껏 살아 온 곳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조금만 짬을 내면
볼거리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혹자는 인구가 적어 장사도 안되고 일자리도 없다고 불만이지만 사람이 넘쳐나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도 나름 불만이 있을터인즉, 선조들의 숨결이 생생하고 천혜의 자연과
여유로운 공간속에서 그 옛날 전설들이 오롯이 살아 있는 곳, 이 어찌 정답지 아니한가.
오늘도 난 오후에 잠시 들른 외산 무진암에서 익어가는 가을에 흠뻑 젖었다.
무량사 가는 길. 아직은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은행잎이 곱게 물든 길을 지나 무량사 사하촌에 이르러 주차장 2,30m 전쯤의 왼쪽에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 좀 오르면 김시습 부도가 있고 곧바로 무진암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길가에 단풍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무진암 가는 길
무량사 부도군.
(무량사)일주문을 나와 무진암 가는 길에 있는 부도밭에 김시습의 부도가 남아 있다.
부여에서는 가장 크고 내력 깊은 절집임을 부도밭에서 또다시 느낀다.
오랜 세월 무량사를 거쳐간 스님들의 부도가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
우리나라의 부도는 팔각의 원당형이 전형적이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개 석종 모양으로
간소해진다. 이곳 부도들이 대개 이렇게 간소한 모습인데, 김시습의 부도는 조선 중기에
세워졌음에도 팔각 원당형인 것이 이채롭다.
-유홍준과 함께하는 부여답사 중에서-
오세 김시습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고 관은 강릉이다. 신라 알지왕의 후손중에 주원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이 있고 태현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이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는 벼슬이 안주목사에
그쳤고, 겸간을 낳았는데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에 그쳤다. 겸간이 일성을 낳으니 음보로
충순위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에게 장가들어 세종 17년 시습을 한사(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8달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치운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공 허조 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니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집에서 면려하게 하며 드러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쳐 오세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에서-
온정이 담겨있는 까치밥
무진암 대웅전
장독대가 특이하다.
무진암 전경
무진암의 가을
무진암을 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단풍의 유혹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