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직하던 해이니 아마도 83년 여름인 것으로 기억된다. 함께 근무하던 젊은 직원들과 춘장대
해수욕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사실 모처럼 바닷가에 왔다는 느낌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던 우리는 물놀이 보다는 민박집에서
고스톱 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꼬박 밤을 새우고 잠시 잠짓을 했나 싶었는데 벌써 한나절이 지난 뒤였다. 지친 직원들이 여기저기 누워있는데다
날씨도 후덥지근해 더 이상 잠을 청할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모퉁이 방 쪽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학생 몇 명이 얼굴을 숙인 채 마루에 앉아있고 그 앞에는 범상치 않은 청년 두 명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며 생김생김이 한눈에 불량배임을 알 수 있는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할꺼냐며 무언가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계속 말이 없자 그들은 잠시 후 다시 올 때까지 결정하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나가버렸다.
청년들이 내 앞을 지나칠 때 나는 두려움에 애써 눈길을 떨구었다.
그들이 저만큼 가는 걸 확인한 나는 얼른 학생들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아무 일 아니라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괜스레 물어보았나 싶어 겸연쩍게 돌아서려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세요."
하면서 울먹였다.
그 학생들은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사내 학교에 다니는 근로 청소년들인데 모처럼 휴가를 맞아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들뜬 기분에 어느 술집엘 들어갔단다. 여섯이서 기분도 살릴 겸 맥주 한 두 잔씩만 하고 나오려는데, 소위 젊은 오빠들이 찾아와 합석하게 되었고, 술값은 자기들이 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함께 놀자는 말에 어린 학생들이이성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 애들은 다 없어지고 테이블에는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는 빈 술병들만 그득 하더라는 것이었다.
결국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기고도 모자라 친구 한 명을 볼모로 남겨두고서야 술집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조금 전 그 여학생을 앞세우고 숙소를 찾은 그들이 나머지 술값을 받기 위해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들은 분명 술집 주인들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었는데, 자기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시키지도 않은 술값을 다 내라고
하니 억울하다면서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으려던 다른 학생이 덧붙였다.
그들이 지키고 있을까봐 겁도 나고 또 가진 돈이 없으니 오고갈 수도 없는 게 그녀들의 형편이었다.
어느 잡지에서나 읽음직한 황당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잘 못 개입하면 불량배들과 싸울 수도 있으니 그냥 덮어두자는 직원들을 설득하여 학생들을 오토바이에 태워 종천으로 데려왔다.
민박집을 출발할 때는 불량배들이 나타날까봐 두려운 생각도 있었지만 다행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종천에 그들을 내려놓은 다음 집에 갈 교통비로 3만원을 건네 주었다. 울먹이던 학생이 고맙다면서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다.
나는 돈을 되돌려 받겠다는 확신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사무실 주소를 적어 주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돈을 돌려 받지 못한 사실에 직원들은 "그러니까 도와 줄 필요 없다니까!" 하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난 어린 학생들이 무사히 귀가하였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라고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 일이 있은 지 보름쯤 지났을까. 그녀로부터 감사의 편지와 돈 3만원이 송금되어 왔다. 그래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한 건 내 쪽이었다.
그녀는 정말 나를 고맙게 여겼던 것 같다.
그 일을 인연으로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간히 안부 전화를 해 오니 말이다. 이제 그녀는 부천에서 통닭집을 운영하는
30대 후반의 어엿한 가정 주부가 되었지만 그 이후 한번의 만남도 가져보지 못한 나에게는 아직도 통통하고 귀엽고 그리고
철없던 여고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부여뉴스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