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에 전문 사회복지사가 채용되기 시작한 것은 91년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일반직 공무원들이 다른 업무와 겸해서 사회복지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복지 시책을 수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다. 고작 자원 관리나 하고 매월 구호 양곡을 나눠주는 일 외에는 생활보호
대상자들의 면면을 파악해서 살피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양곡을 나눠주는 일이 주 업무다 보니 사람들은 복지
담당자를 '배급서기'라 불렀다.
나도 80년대 후반 모 면에서 배급 서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창고에서 배급을 주고 있었는데 어느 할머니 한분이 갑자기 내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는 나에게 그 할머니는 "어제 애기 엄마 한테 빌린 거여" 라며 갖다주면 안다는 듯 방긋이 웃으셨다.
사는 데가 동떨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내 아내를 알 리가 없는 할머니의 말에 어리둥절 해 있는 나에게 "갖다 주면 알거야"라고
재차 말씀하셨다.
뒤늦게 할머니의 말뜻을 알아차린 나는 몹시 황당하기도 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예! 알았어요"하면서
얼버무렸다.
그 할머니는 나이도 많으셨지만 몸이 불편 하셔서 구호 양곡을 받아도 스스로는 가져갈 수 없는 분이셨다. 물론 대부분 연로한 분들이셔서 다들 비슷한 처지였지만 이분은 유독 딱해 보여서 내가 매달 양곡을 차로 실어다 드리고 있었다. 면사무소에 행정
차량도 없던 시절이었던지라 내 포니 승용차가 유일한 차량이었다.
무거운 짐과 함께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는데다 배급을 정해진 날이 아닌 늦게 타러 오더라도 불평 없이 주니 더없이
고맙더라는 말을 후일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사실 대부분 복지 업무 담당자들이 급사 아저씨들에게 일을 시키기 일쑤여서 본연의 업무도 아닌 일로 양곡의 분진을 하얗게
뒤집어 쓰면서 나눠주다 보면 불친절하게 대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하루라도 늦으면 핀잔을 들어야 했던 그분들이 새로 온 배급 서기의 작은 친절에 고마움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 오천 원이란 돈은 더구나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있어서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나는 본의 아니게 뇌물을
받게 된 것이었다.
몇 년 후 군청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찾아 오셨다. 읍내 병원 오는 길에 물어물어 찾아 오셨다며
여름 휴가를 제주도로 갈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제주도로 시집간 딸이 있는데 '배급 서기 양반'얘기를 했더니 그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냐며 제주도에 오면 꼭 자기 집에 들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화 번호가 적힌 구겨진 종이
쪽지를 허리춤에서 꺼내 주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행한 나의 작은 행동이 그렇게 강하게 각인 될 줄이야!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그 할머니가 건네준 오천 원의 뇌물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지며, 친절의 값진 교훈을 수시로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고마운 분이시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부여뉴스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