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껏 대재각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부여에 살면서, 아니 부여군의 공직자로서 때로는 부여의 역사가 어쩌니저쩌니
논하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대재각을 한 번도 직접 가보지 않았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었다.
자주 찾는 부산서원과는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부산의 절벽 아래에 위치 해 있다는 것만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 멀 것이라는 편견이 아마도 길을 막았을 것이다.
오늘 충화면에서의 명산탐방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랜 숙제를 푸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대재각을 가기 위해서는 규암면 진변리 백강마을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잠시 걸어야 한다.
마을 입구에 마을 유래를 전해주는 신구의 안내판이 이렇게 서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부산서원.
부산의 양지바른 남록에 자리 잡은 부산서원은 1719년 신독재 김집 선생과 백강 이경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의 장학을 위해 창건되어 숙종으로부터 사액된 유서 깊은 곳이다.
서원을 지나 강가에 위치한 농가들 사이로 들어가면
맨 마지막 집 앞에서 강을 향해 간다. 멀리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대재각은 왼쪽 왕흥사지 방면
바로 우측에는 나루터가 있는데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지금도 고기잡이 배의 나루로 사용되고 있다.
부산으로 올라가는 초입길
부산의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들. 그런데 아쉽게도 대재각의 위치는 아무데도 표시되어 있지 않아
초행인 외지인들이 찾아 가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많은 예산을 들여 새롭게 백마강 길을 개설하면서
기존의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배려는 왜 하지 못했을까?
초입에서 이런 나무계단을 한 2백미터 정도 오르다 보면
계단이 끝나고 15미터쯤 지점에 우측으로 이런 오솔길이 나 있다.
대재각은 이 길로 가야하는데 대재각의 위치가 대충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칫 정상으로 올라가 버릴 수 있어, 이곳에 조그만 안내판 하나 정도 세워두면 좋겠다.
그 오솔길을 조금 걷다보면 이런 철계단이 나타나는데 비로소 대재각으로 내려가는 길임을 알 수 있게된다.
철계단 위에서 내려다 본 대재각
역시 강 건너 외딴 곳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관심을 덜 받는 모양이다.
안내판이 갈라지고 퇴색되어 보기 흉하다.
대재각은 부산 동남편 백마강변 암벽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효종 8년에 이경여가 상소를 올리니,
"성이지통재심 유일모도원의(誠以至痛在心 有日暮途遠意)" 란 구절이 들어 있는
비답을 왕이 내렸다.
백강은 이 때 73세로서 북벌계획과 관계된 시정을 논한 상소를 올린 것인데 왕의 답은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하니 마음만 아플 뿐이요, 가고자 하나 날은 저물어가니
뜻도 멀어만 진다는 북벌 계획과 관계된 뜻을 지닌 내용인 듯 하다.
백강은 공의 호이고, 자는 직부(直夫)이다. 공은 병자호란(1636년)때 인조를 모시고
남한 산성에 피난하였고 1644년 왕의 사신으로 심양에 갔다가 구속 되었으나
세자를 따라 돌아와 효종 때 영의정이 되었다.
후에 송시열이 효종 대왕의 비답에서 취하여 8자를 써서 백강의 아들에게 전한 것을
손자인 이이명이 이 곳 암벽에 새기고 정자를 세워 대재각이라 하였다.
-전통문화의 고장 부여, 내고장 전통 가꾸기 발췌 -
대재각에서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설치되어 있다.
대재각에서 바라본 백제교. 미세먼지 탓으로 시야가 영 안좋다.
멀리 부소산과 구드래 나루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구드래 맞은편 신리와 왕흥사지 주변
부여 시가지
대재각과 그 안에 걸려있는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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