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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여인

서해안 나그네 2012. 2. 27. 23:41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초여름이었다.

만났다기 보다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되겠지만,

아무튼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7월 초의 어느 밤이었다.

그날도 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궁남지에서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궁남지는 야간 조명이 잘 되어있고 여기저기 산책로가 많아서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의 운동 장소로 각광을 받아오고 있는데

나도 별 일 없는 날이면 꼭 운동을 나가곤 한다. 궁남지 가장자리를 따라 돌면 한바퀴 도는데 약 2천7백보쯤 되니 세, 네 바퀴

돌면 한시간 넘는 운동량이 된다.

마지막 바퀴를 돌면서 어느 여인과 마주쳐 지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며 발길을 멈추었다.

코끝을 타고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그녀의 향기가 내 발길을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향수' 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집착하며 만든 향수가 모든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마치 내가 그 황홀경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비록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여인의 향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녀가 멀리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향이었다.
혹시나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리하게 한 바퀴를 더 돌았지만 그날은 더 이상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다행이  그 후로 그녀를 몇 번 만날 수 있었다. 평소많은 사람들과 교행을 하게 되지만 잘 아는 사람 아니고는 밤에 누군지

식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번 깊게 각인된 그녀의 향기가 쉽게 그녀임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하였다.

일주에 한 번, 또는 이주에 한 번 정도 산책을 나오는 그녀의 향기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얼굴은 자세히 볼 수가 없었지만 자그마한 키에 조그만 가방을 메고 다니는 데 때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서 조용조용

걷곤 하였다.
밤 9시가 넘어서 주로 나타나는 걸로 보아 어디 학원 강사인듯 싶은데 아마도 강의 끝내고 잠시 바람 쏘이러오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마주침이 있은 뒤부터 궁남지 운동을 할 때면 혹시나 그녀를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다림이 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그녀가 나온 날에는 사춘기 소년처럼 콩콩 뛰는 가슴을 안고 그저 스쳐 지나곤하였다, 말을 붙여보기는 커녕

얼굴도 제대로 바라다 보지 못하는 수줍음으로.

그 후 8월 중순경부터 한 보름동안 궁남지 서동 연꽃 축제로 밤낮없이 인파가 북적거리는 바람에 운동을 하지 못하였고,

축제가 끝난 8월 말부터는 잦은 가을비로 역시 운동할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가을이 시작된 요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어디로 멀리 가버린 것일까. 아니면 연꽃속에 사는 작은 요정이었을까.
연꽃속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나타난 요정? 그래서 연꽃이 다 져버린 지금 함께 사라져버린 것일까?

늘그막에 이름모를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솟아남은 또 무슨 연유이며 주책인지.
아무튼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의 향기는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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