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땅에도 아침은 온다,
아득한 평야에 새벽이 열리면
어디서라 없이 들려오는 가벼운 휘파람소리,
물 길어 오는 아낙의 물동이 가에
반도의 아침이 열린다,
냇가에선
일찍 깬 물새가
강언덕 인사를 보내며
이리저리 준비운동을 하고,
외양간에선
건장한 황소가 긴
심호흡을 한다,
진아는
아들을 낳았다,
복슬복슬한
아기 하늬,
금강의
흰 물굽이가 가물가물 내려다보이는 동혈산,
쉰 길 바위 아래 초가집, 사리원댁
할머니의 도움으로
꼬마 하늬가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애정
쏟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벌어진 석류알처럼 피어나고
눈동자는 물먹은 별
습기차게 빛난다,
자침이
겨냥을 얻어
조금 흔들렸단 멎고
기둥 못을 뽑아 달아나려고 하듯,
넘칠 곳
찾던 저수지의 물이
터 놓은 물꼬를 얻어
미친 듯 춤추며 휘말려가듯,
암 전기가
수 전기를 만나
힘을 규합하며 커다랗게
빛 발하듯,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화안히 피어난다.
진아의 얼굴도
봄과 함께, 사랑과 행복으로
다숩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늘,
그렇다
햇빛이 준 아름다움일까,
옛날
하늬가 그랬었듯
꼬마 하늬의 탐스런 손목에서도
조그만 은방울 떠날 날
없었다.
아기 하늬
품에 안고 진아는 뜰에 앉아
골짜기 덮은 진달래
구경,
옆에선
하늬 얼르며
뜨개질하는 사리원댁,
할머니.
우리의
가슴 적시며
노래가 지나가듯,
우리의
강산 디디며
비는 지나갔나,
비먹은
진달래, 강산을 채워
일제히 진달래 마을로
피어나는데,
우리의
가슴마다
새 비 맞은 진달래 화창히
피어나는데,
진아는
품속의 하늬, 얼르며
먼 금강줄기
바라보다
머루알 깨물었다.
그러나
슬프진 않았다, 하늬는
진아의 전부, 전 우주,
어디서 오는걸까, 이 사랑
이 나른한 충족.
이제 고만.
진아의 이야긴 섭섭하지만
끝내련다,
다만
하늬가 남아 있다,
어떻게 됐을까, 계룡산 산마루에서 빛났던 그 정신,
그러나, 오늘까지
아무리 자료를 뒤져도
그에 관한 뒷소식
얻을 수 없다,
다만
젤 마음에 지피는 이야기
하나.
곰나루 함성 뒤
석달 지난 다음해 정월
보름날,
서정리 역에선
왕병과 왜군, 동네 토반, 유림들이 합세
마을 농민 스물일곱 명을
능지처참했다,
네 마리의, 말 허리에 감겨진
쇠줄로 사지를 묶어
사방으로 달리게 채찍한다,
눈 벌판 속
수십 개의 모닥불 피워놓고
온종일 술잔 기울이며
베푸는 장님들의
피의 잔치,
북소리,
환호성.
어쩌자는걸까,
바람버섯 찢는걸까,
꽃노을
아름답게 물든 저녁나절
웬 낯선 청년 하나가 산에서 내려와
뚜벅뚜벅
형장의 중앙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형리들의 손
뿌리치며,
그리고선
눈 위에 네 활개
펴고 드러누웠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사나이, 얼굴에
돋는 무지개.
어서
나, 찢으라고 말할 뿐
딴 말이 없었다,
한쪽
손바닥에
덜 아문
흉터가 있었다,
네 쪽으로
찢길 때도
떡이 찢기듯,
살덩이만 몸부림쳤을 뿐,
신음소리 하나
없었다.
後話 <1>
밤 열한시 반
종로 5가 네거리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통금에
쫓기면서 대폿잔에
하루의 노동을 위로한 잡담 속
가시오 판 옆
화사한 네온 아래
무거운 멜빵 새끼줄로 얽어맨
소년이, 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다,
충청남도 공주 동혈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소년의 눈동자가
내 콧등 아래서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들고
바삐바삐 지나가는 인파에
밀리면서 동대문을
물었다,
등에 짊어진
푸대자루 속에선
먼길 여행한 고구마가
고구마끼리 얼굴을 맞부비며
비에 젖고,
노동으로 지친
내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2>
1894년 3월
우리는
우리의, 가슴 처음
만져보고, 그 힘에
놀라,
몸뚱이, 알맹이채 발라,
내던졌느니라.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19년 3월
우리는
우리 가슴 성장하고 있음 증명하기 위하여
팔을 걷고, 얼굴
닦아보았느니라.
덜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60년 4월
우리는
우리 넘치는 가슴덩이 흔들어
우리의 역사밭
쟁취했느니라.
적은 피 보았느니라.
왜였을까, 그리고 놓쳤느니라.
그러나
이제 오리라,
갈고 다듬은 우리들의
푸담한 슬기와 자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 세상 쟁취해서
반도 하늘높이 나부낄 평화,
낙지발에 빼앗김 없이,
우리 사랑밭에
우리 두렛마을 심을, 아
찬란한 혁명의 날은
오리라,
겨울 속에서
봄이 싻트듯
우리 마음 속에서
연정이 잉태되듯
조국의 가슴마다에서,
혁명, 분수 뿜을 날은
오리라.
그럼,
안녕.
언젠가
또다시 만나지리라,
무너진 석벽, 쓰다듬고 가다가
눈 인사로 부딪쳤을 때 우린
십겁의 인연,
노동하고 돌아가는 밤
열한시의 합승 속, 혹, 모르고
발등 밟을지도 몰라,
용서하세요.
그럼
안녕,
안녕,
논길,
서해안으로 뻗은 저녁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해후할지도
몰라.
지난 해
신동엽 문학관 김형수 관장님의 주선으로
인문학 강좌를 들을 수 있었다.
신동엽 시인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그의 서사시 금강을 필사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장에 꽂혀있던 창비사에서 발행한 <신동엽전집 증보판>에
수록되어 있는 <금강>을 필사하기로 하고
생각 날 때 마다 한 장씩 블로그에 써 내려갔다.
사람들이 왜 어렵게 필사를 하는지,
눈으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때마침 필사중에 내란정국을 만나
신동엽 선생의 시구절 하나하나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만약에 선생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또 어떤 피 토하는 심정의 언어들을
내놓으셨을까 생각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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