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수집

신동엽 서사시 금강 제23장

서해안 나그네 2025. 5. 26. 01:12

시월 25일

공주 우금티의 결전 이후

일본군과 이왕병은, 패잔한 농민군, 농민군 가족,

농민군에게 밥 지어준 부녀자들까지 수색, 추격,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가는 곳마다, 마을은

태풍이 지나간 벌판처럼

쓸쓸하였고,

두어 그루의 나무가

중둥이 부러진 채 추레하고

서 있었다.

 

집집마다 연기가 끊어지고

인적도 끊어졌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땅을 굽어보고, 그러나 눈은 불안에

떨면서, 그렇지

쫓기는 사람처럼 바삐 바삐

지나갔다,

 

눈발 날리는

11월 한 달, 가마니 짜고

짚신 삼는 12월 한 달, 다음해

정월 대보름, 2월, 3월

자운영 피는 춘궁기까지,

이왕병은 왜군과 손 잡고 다니면서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총검으로 쑤셨다,

 

영동에선

아궁이 속 숨어 있는

일곱살짜리 계집앨 끌어내

아버지 있는 곳 대지 않는다고

기관총 갈긴

일병,

 

청산에선

미친개, 이진호 이겸제 등이 거느린

왕병과 일군 기관총 소대가

3백 5십 명의 농민 사살하여

보리밭에 버렸다,

 

그들은 다음날

옥천에 들어가

동학교도 정원준 서도필 등

아홉 명의 노인을

눈 사태 속 끌어내

발가벗겨 세워놓고

사격,

 

이두황이 인솔한 왕병은, 왜군 기관총소대의 지원을

얻어 온양에서 농민 9십여 명을 창고 속에 몰아,

넣고 불질렀다, 그리고 동네 부녀자들 강간한 뒤,

기관총 난사.

 

이두황, 그도 엄마 젖을 빨며 자란, 사람 아들이

었을까, 바람 맑은 반도에서도 이따금 그런

고장난 기계가?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백2십명, 4백명,

2백 7십 명씩 총살하고 강간하며

해미, 서산, 매현

유구, 노성, 은진

정산 등으로 설쳤다,

 

이제 고만,

팔도 휩쓸던 이런

고장난 얘기는 끝도 없고

부끄러운 얘기,

 

다만

아직도 몇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후퇴령을 내린 전봉준은

잔존부대 만여명 이끌고 전북

금구까지 와,

산과 내를 이용하여

반격태세 갖췄다,

 

그러나 월등한 화력 앞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아성,

대포와 기관폴 맨몸으로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봉준의 오른쪽 어깨엔

깊숙한 파편,

 

봉준은, 자진 해산령을 내렸다,

 

  《동지들, 고향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 기다리고 있어 주오.》

 

눈 벌판 속을,

순창 땅 향해

산길 걷는 외로운

그림자,

봉준의 마음,

 

하늬가 말하던

유격대,

유격작전을

생각하며 산길을

뛰었다,

 

淳昌郡 노피리

김접주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갑오년 12월 초이틀,

밤,

 

군불 넣은

쩔쩔 끓는 아랫목.

밖에선 함박눈,

내년의 풍년을 예고하는

소담한 함박눈이

오리나무 숲의 시린 발등을

덮으며

쌓인다,

 

지리산 양지쪽,

눈 덮인 붉은 흙 속에선

쑥, 진달래 뿌리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그 향내나는 살로,

 

처마 속 잠자던

참새들이 푸득푸득 날아

뒤꼍 장작우리 속으로

숨었다,

 

그날 새벽

봉준은,

눈길 위 자죽난

천냥의 현상금 따라 뒤쫓아온

토반 관병 스무 명에게 포위되어

묶였다,

 

눈먼 토반들은

다음날 천 량 받고 봉준을

일본군에게 인도했다,

 

봉준은

동아줄로 묶인 채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

 

들것을

네 귀퉁이서 얽메고 가는

사람은 상투 튼 조선사람

그 뒤 총들고 따르며 담배 피는

사람은 왜놈,

 

봉준은

서울 오는 나흘 동안

입 한 번 열지 않았다.

 

눈은

감은 채, 물 한 모금

담배 한 모금

입 대지 않고

조용히, 그림처럼 정좌하고

있었다,

 

머리 위서

반도의 하늘이 그를 호송하는 듯

따라오고,

 

어디선간

방울새, 한 마리

그의 어깨 위 날아와 앉았다간

냇물 건널 때

날아갔다,

 

산이

가면 마을이, 마을이

가면

들이 열렸다,

 

기다리는 사람은

맛보는 사람,

 

돌아다니는 사람은

먹는 사람.

 

을지로 6가

지금은 도로공사로 헐렸지만

광희문 밖,

 

언젠가

미군 찦이

대포집 들이받아

안방 뒤집어 놓고

핸들 잡은 채

껌 씹고 있던,

 

그리고 그 앞으로

천연스럽게

여대생,

너는 걸어오고 있었지,

 

지금도 있을까

녹두지짐이를 팔던

눈이 무른 그

과부댁들,

 

언제 보아도, 광희문

너는

우중충한 돌이끼.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왔다,

 

형리가

동아줄 끄르는

자기 손가락마저

분간 못할 만큼

비가 쏟아졌다,

온종일.

 

그리고

오후 세시, 돌문 밖

질경이랑 반지꽃이랑 냉이랑

예쁘게 돋은 흙언덕

높은 장대 위,

 

교수된

전봉준의 머리는

칼로 다시 잘리워

매달리웠다,

 

다섯 차례의

혹독한 왜식 고문,

일본인 낭인 타께다, 다나까의 번갈은

일본망명 권유,

인품에 감동, 뒷날의 쓸모를 계산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의 은근한 호의

들은 체 하지 않고

발 밑에 이까려버린

농민지도자

전봉준의

비.

 

그는

목매이기 직전

한 마디의 말을 남겼다

 

  《하늘을 보아라!》

 

그의 곁엔

고창에서 체포된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의

머리가 나란히 효시됐다.

 

그 앞을, 누가 지나갔고

누가 지나왔을까,

 

그리고

며칠 후, 서소문 밖

장터 네거리엔 전주 숲정에서

참수된 김개남, 성재식의

머리가 효시됐다,

 

맨발벗은 아이들이

손가락 물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을까,

 

그 무렵

여행용 트렁크 들고

한양성에 들른 영국 관광객

비숍여사는, 표현했다, 효시된

혁명지도자들

얼굴마다,

서릿발이, 엄숙하고

잘 생겼더라.

 

기록에 의하면

갑오년서 다음해 봄까지 사이

전국에 5십만명의 농민이 봉기,

싸웠다,

 

그리고

십만명이 죽고

다치고

집을 잃었다,

충청, 전라도에선 전지역,

 

경상도 상주, 문경, 영주

진주, 마산, 밀양, 김해,

 

강원도 원주, 춘천, 홍천,

 

황해도 해주, 사리원, 백천,

구월산, 풍천, 장연, 수안,

 

평안도 용강, 평양, 신의주,

정주, 진남포,

 

함경도 원산, 청진,

 

방방곡곡에서

쇠스랑 들고 함성지르며

일어났다,

 

벗고도 싶었으리라, 굴레,

찢고도 싶었으리라, 알살 덮은

쇠항아리.

찢어진 쇠항아리 사이로 잠깐

빛난 하늘,

 

살무더기의 소망

꽃들의 기구

쌀밥 사발의 기원,

 

누가 꺾었나,

 

그러나

꺾였을까?

 

   <밀알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 알로 있을 뿐이나,

    땅에 떨어져 썩으면

    더 많은 밀알 새끼 치느리라.>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은 바람버섯은

하늘도 못보고,

번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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